이성규단장칼럼

16-02-25 17:18

사람구실 - 2015. 12.

관리자2
조회 수 1,670 댓글 0

  선물을 하기 위해 제과점에 들러서 롤케익을 샀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점원 아가씨가 조심스럽게 저에게 부탁을 합니다. 소스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따야 하는데 남자직원이 없어서 못 열고 있다며 그 뚜껑을 열어줄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남자들은 누구나 그렇듯이 여성분이 부탁을 하면 남자다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서 왠지 뿌듯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남자인지라 그 병뚜껑을 시원스럽게 돌려 따주고 남자답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심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호기롭게 그 뚜껑을 돌리는데 아무리 힘을 써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돌려봤지만 소용이 없어서 결국은 포기하고 돌아섰습니다.

   겨우 병뚜껑을 따는 일이지만 여성분들 앞에서 제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 내심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제가 남자답지 못하고, 허약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병뚜껑을 따지 못한 것 때문에 제가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저 제 힘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을 뿐 여전히 저는 남자입니다. 제가 해내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저의 한계이며, 단지 기능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굳이 병뚜껑 하나도 따지 못하는 못난 남자로 낙인찍힐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병뚜껑이 머릿속에 한참동안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중도 장애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다친 것은 내가 이겨내면 되지만, 가장으로서 사람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이 듭니다

그분의 이야기 역시 자신이 남자로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멋지게 하고 싶은데, 장애를 입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단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남자이며, 가장이며, 아빠이며 남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기능에 한계가 있는 것이 그사람의 존재 자체를 위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그 사람의 기능의 높고 낮음에 따라 존재가치를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입니다.

   병뚜껑을 못따도 남자는 남자이듯, 장애를 가지고 한계를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충분히 사람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있으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장애인들 모두가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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